미시성 Micro-Perspective
기술은 오랫동안 위계적인 구조 속에서 확산되어 왔다. 정부나 군사 기관에서 개발된 기술이 기업을 거쳐 일반 대중에게 도달하는 상향식(top-down) 모델은 고비용, 희소성,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기술 환경에 기반한 것이었다.그러나 최근의 기술 발전은 이러한 흐름을 전환시키고 있다. 특히 생성 기반 기술과 인터페이스 중심 도구의 등장은 복잡한 시스템을 거치지 않고도 개인이 곧바로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고, 이는 기술 주도권을 개인에게 이전시킨다.이로써 개인의 서사와 질문은 힘을 갖게 된다. 개인의 기록물들은 명확하고 일관된 구조를 따르지 않지만, 분류되지 못한 채 쌓이는 파편 자체가 하나의 서사로 간주되며, 이는 동시대의 정서와 감각을 드러내는 중요한 사회적 단서로 기능한다.지금 이곳에서 당신의 말은 ‘역사’가 된다.
가상성 Virtuality
디지털 환경에서 진실은 더 이상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이미지, 텍스트, 정체성까지도 생성과 편집을 통해 재구성되며, 그 진위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닌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점차 가공된 것에 익숙해지고, 실제와 가상이 섞인 서사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필터링된 모습, 픽션 기반의 내러티브, 아바타로 대체된 존재는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이러한 가상성은 현실의 결핍을 보완하고, 이루지 못한 감정이나 관계, 정체성을 투영하는 공간으로 작동한다.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을 상상하고, 느끼고, 구성할 수 있는 이 환경은 감각적으로는 ‘현실’과 다르지 않다. 가상은 더 이상 반대 개념이 아닌, 감정적 진실이 작동하는 병렬적 공간이다.
시간성 Temporality
정보는 초 단위로 빠르게 생성되고, 실시간으로 확산된 뒤, 곧 다음 정보들에 의해 밀려난다. 이 흐름 속에서 사용자는 과거보다 빠른 속도로 사유하고 소비하며, 점차 ‘기억’보다는 ‘순간’에 반응하는 존재로 변모해왔다. 무엇인가를 기억하기도 전에 또 다른 정보가 도착하고, 감각은 연속적이지 않은 자극들 사이에서 방향을 잃는다.과잉의 흐름 속에서 정보는 직선적인 시간축 위에 쌓이지 않는다. 콘텐츠는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흐름에 존재하지 않고, 언제든 다른 시간대에서 호출되고 재구성된다. 지금 보고 있는 영상이 어제의 기록인지, 몇 년 전의 이야기인지, 혹은 조작된 미래의 이미지인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디지털 시간성은 과거·현재·미래의 경계를 흐리며, 다양한 시차가 공존하는 환경을 만든다.이와 같은 시간성은 이제 우리 시대의 역사를 형성하는 새로운 리듬이 되었고, 개인이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 자체에 변화를 일으켰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감각을 포착하고, 또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전시 서문
작은 손짓 하나로 수많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짧은 순간 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고, 동시에 디지털 세계에 자신의 사적인 일상을 공유한다. 눈 깜짝할 새 바뀌는 트렌드처럼, 모든 것은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이다. 무엇을 보았는지는 빠르게 잊히지만, 그것은 분명히 ‘우리 시대’의 일부였다.불확실성과 과잉 정보 속에서 안정된 공동체 기억은 점차 해체되고 있다. 무엇을 함께 기억하고, 무엇을 공유하고 있는지조차 흐릿해진다. 스토리는 실시간으로 이름 모를 이들에게 공유되고, 브이로그는 파편적으로 재생산된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 안에서도 여전히 우리를 잇는 미세한 감각은 존재한다. 이 감각은 지역과 문화권의 제약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얇은 유대의 층을 쌓아간다.변화 속에서 개인은 창작자이자 소비자로서, 비공식적 역사 서술의 주체가 된다. 개인의 기록은 사적 감정에 기반하거나, 다양한 시간대를 차용하고, 때로는 가상 세계를 반영한다. 무명의 개인들이 남긴 기록들은 하나의 역사적 사료로 기능하며, 과거 거대한 사건과 영웅을 중심으로 구성되던 서사를 대신해 새로운 시대의 초상을 그려낸다.본 전시는 그렇게 흘러가는 이야기들이 일시적으로 머무는 곳이자, 디지털 시대의 공동체적 감각을 저장하는 서버로 작동한다. 지금 이곳에 놓인 기록들은 새로 쓰이는 것이 아니다. 너무 익숙해서 별것 아닌 듯 무심히 지나쳤던 장면들이다. 우리가 일상의 단편으로 여겨버린 것일지라도 이미 켜켜이 축적된 것. 어쩌면 지금 이 시대를 가장 생생하게 증언하는 목소리일지 모른다.
Countless stories unfold from a single small gesture. We step into someone else’s life in one fleeting moment, while simultaneously sharing fragments of our own in the digital realm. Like ever-changing trends that shift in the blink of an eye, nothing stays fixed and everything is in constant motion. What we’ve seen fades quickly from memory, but it was undoubtedly a part of ‘our time’.In an age of uncertainty and information overload, the stability of our collective memory is steadily breaking down. Even our sense of what we remember and share together is starting to blur. Stories are broadcast in real time to anonymous audiences, while vlogs are endlessly fragmented and reproduced. And yet, amid this ceaseless flow, a faint but persistent sense of connection continues to bind us. This shared sensitivity forms a quiet, universal empathy; one that transcends geography and culture, gradually layering itself into fragile networks of connection.In this shifting landscape, individuals become both creators and consumers: active agents in narrating unofficial histories. These personal records may draw from private emotions, span multiple temporalities, or reflect virtual worlds. The traces left behind by anonymous individuals begin to function as historical material, sketching a portrait of our time no longer centered on monumental events or heroic figures.This exhibition becomes a temporary home for those drifting stories, a kind of server that stores the communal sensibilities of the digital age. The records gathered here are not newly written; they are scenes so familiar we may have passed them by without a second glance. Even if we’ve dismissed them as fragments of daily life they’ve already accumulated layer by layer- perhaps offering the most vivid testimony of the present moment.
전시 정보
포스터 디자인 이시원 @postcardfromsw
〈 전시 공간 〉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제1관
서울특별시 마포구 와우산로 94
홍익대학교 문헌관 4층2025. 7. 14 (월) - 7. 19 (토)
평일 10:00 - 18:00 / 토요일 10:00 - 14:00
교내 주차장 이용 (유료)
미진 플로어
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로 134
미진빌딩 지하 1층2025. 7. 14 (월) - 8. 15(금)
10:00 - 18:00 (월요일 휴관)
*전시 오픈 당일인 7. 14 월요일은 운영
〈 행사 〉
오프닝 리셉션
2025. 7. 14 (월) 16:00 - 18:00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제1관 (문헌관 4층)
교육 프로그램: 전시 해설 쉽게 쓰고 말하기
1회차 |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제1관 (2025. 7. 18)
2회차 | 미진 플로어 갤러리 (2025. 7. 25)
〈 기획 〉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전시기획팀 콜렉티브 201
김효진 윤형민 강혜인 권소연 김나현 김서영 김영원 민정범
박민지 박한비 신서연 이린 이시원 최재희 Sarah Bakker
후원 및 협찬
후원 다전디자인그룹 은민에스엔디
협찬 블룸즈베리랩

다전디자인 그룹은 1999년 설립되어 상업·주거·문화 공간 전반을 아우르는 디자인을 해오고 있다. ‘우리는 창의적이고 진취적으로 생각한다’라는 기업 이념 아래, 사용자의 니즈를 충족할 수 있는 공간 디자인을 위해 끊임없는 혁신을 도모하고 있다. 최근까지 국토부장관상 수상 등 국내 공간 디자인의 선두주자로 업계를 이끌어가고 있다.

은민에스엔디는 ‘인간 중심의 창조’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1998년부터 공간의 가치를 고민해왔다. 기술과 디자인의 조화를 통해 라이프스타일의 질을 높이고자 하며, 인테리어 컨설팅부터 디자인, 설계, 시공, 관리에 이르기까지 공간 전반에 걸친 전문 역량을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공간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현재까지 미국, 베트남, 캄보디아 등지에 해외 법인을 설립하며 글로벌 시장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2010년에 설립된 블룸즈베리랩은 영화관의 스크린 및 프로젝션을 제조하는 선도적인 업체이다. 일본,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14개의 국가의 주요 영화관 체인들과 해외 파트너십을 맺고 있으며 글로벌 영화관 시장에서 입지를 확대하고 있다.
본 전시에서는 블룸즈베리랩이 협찬하는 홈시네마 스크린을 통해서 미디어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제1관의 '가상성' 섹션 속 김웅현의 〈리보솜〉(2020), 교각들의 〈미소녀는 수육受肉하지 않는다〉(2024-2025)와, '시간성' 섹션 속 Elinor O’Donovan의 〈Requiem for Barbapapa〉(2025)는 블룸즈베리랩의 홈시네마 스크린을 통해 보다 몰입감 있고 완성도 높은 전시 경험을 선사할 예정이다.
https://en.bloomsburylab.com/
https://www.instagram.com/bloomsburylab_official/
콜렉티브 201
콜렉티브 201은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학부 4학년 교과목 '전시기획 및 실습'에서 파생된 전시 기획 콜렉티브입니다.
디지털 상에서 서버가 새로운 파일, 글 등을 성공적으로 생성했을 때, 브라우저에 알려주는 응답 코드 ‘201 Created’에서 따온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해당 교과목은 매년 정연심 교수님의 지도 하에 미술적 담론에 대한 기획전을 개최해오고 있습니다.INSTA @practiceof.curating
EMAIL [email protected]
ARCHIVE https://practiceofcurating.carrd.co총괄 김효진 윤형민
공간기획 강혜인 권소연 김나현 민정범 박한비 신서연
디자인 이시원 윤형민 최재희
홍보 김서영 김영원 박민지 이린 Sarah Bakker
지도교수 정연심
전시 자문 정연심 박윤아
Copyright © 2025 Collective 201
홈페이지 관련 문의 [email protected]
박론디(b. 1993)는 영국 브라이튼대학교 학사 졸업 후 현재 스위스 북서부응용과학대학교(FHNW) 에서 석사 과정을 밟으며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유년 시절의 기억에서 출발해 자본주의 사회 속 소비재가 작동하는 방식과 그 안에 내재된 욕망의 알레고리에 대해 탐구한다. 특히 ‘귀여움’이라는 정서가 어떻게 소유 욕망과 정동을 매개하여 개인의 서사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 추적한다. 길고 서술적인 제목 아래 묘사된 ‘다가올 미래를 외면한 채 눈앞의 현실에 매료되어 돌진하는’ 작품 속 주인공들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개인들의 모습을 거울처럼 투영하고 있다.
When Awww Turns To Awe¹
‘아’(‘귀여움’을 느낄 때 외치는 탄성)가 경외감이 될 때
글 민정범
손안에 꼭 쥐고 싶었던 인형, 반짝이던 시계, 예쁜 포장지. 박론디는 바로 그 어린 날의 욕망이 오늘날 우리를 어떻게 이끌고 있는지를 다시 묻는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²〉(2021)는 어렸을 때 느낀 ‘귀여운’ 대상을 소유하고 싶다는 근원적 욕망이 어른이 되어서 충동소비의 방식으로 되풀이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새로운 욕망도 꿈틀대기 시작한다. 캔버스를 빠져나올 듯한 기세로 달리는 두 마리의 말이 그려진 작품 〈6년을 사귀고 헤어진…³〉(2021)은 어른들의 연애사를 담고 있다. 박론디는 일종의 상담사가 되어 친구 두 명의 연애사를 수개월동안 듣고 작품을 제작했다. 작가는 급속도로 사랑에 빠지는 것은 낭만적이기만 한 것이 아닌, 불안과 충동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욕망의 장과 같다고 말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불안이 시작되면 우리는 주어진 사과를 따먹는 것보다 매니악처럼 뛰어다니는 것에 집중한다.〉(2023)에서 이어진다. 작품은 이상과 현실 간의 모순적인 긴장 속에서 작가 자신이 경험한 불안의 감정의 진폭을 묘사하고 있다.박론디는 일상 속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더는 문제시되지 않는 현상들에도 질문을 던진다.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소비재로 환원하려는 자본주의적 감각이 바로 그것이다. 식물과 그 수액을 탐욕스럽게 먹어 치우는 벌레들을 그린 〈그들은 진짜 맛있는…⁴〉(2024) 은 물적·인적 자원을 소모하며 살아가는 현 세태를 묘사한다. 두 점의 세라믹 작품 〈Desperation=motivation〉(2024)과 〈When Did TIME Become MONEY?〉(2024)는 ‘시간이 금’이라고 말하며 비물질적 가치마저 효율과 생산성으로 환산하고, 자본화된 시간을 당연시한 채 살아가는 오늘날의 삶을 반추하게 한다.박론디가 지속적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추적하는 이유는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아주 큰 틀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가장 생생하고 내밀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상적인 경험과 단상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보편적인 서사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작가가 선택한 재료들—수채화 물감, 색연필, 천, 세라믹 등— 또한 누구나 유년기에 한 번쯤은 접해본 친숙한 재료들이다. 지워지거나, 찢어지거나, 깨지기 쉬워 유한하다는 공통적 속성을 지닌 이러한 재료들은 욕망 앞에서 흔들리는 개인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 가장 적합한 매개가 된다.흔히 한국 사회에서 ‘귀여움’은 ‘무해함’과 동일시되곤 한다. 그렇지만 귀여움이 과연 무해한 것인가? 발터 벤야민은 한때 이런 말을 남겼다. "마르크스가 가끔 농담 삼아 언급했던 상품의 영혼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영혼의 영역에서 지금까지 만난 것 중 가장 공감 능력이 뛰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손과 집에서 '둥지를 틀고 싶어 하는’ 구매자를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귀여움’은 단지 사랑스러운 외피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 속 욕망의 본질을 가장 날카롭게 포착하여 우리를 유인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박론디의 ‘귀여운’ 작품들은 대상의 본질을 잊게 해 소비재로 전락하게 만드는 욕망의 본질을 드러내며 경고하고 있다.
¹ Elizabeth Legge. “When Awe turns to Awww: Jeff Koons' Balloon Dog and the Cute Sublime,” The Aesthetics and Affects of Cuteness (New York: Routledge, 2016) 에서 ‘When Awe turns to Awww’의 어순을 변경해 만든 제목.
²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낡은 캐비넷 속 잔뜩 몸을 부풀린 나바호 악세사리들 틈에 손을 꼭 맞잡고 있는 아이들을 데려오기 위해 카드를 긁었다. 잔고 부족〉
³ 〈6년을 사귀고 헤어진 애인을 잊기 위해 앱에서 만난 사람과 소통하고 있었다. 그는 똑똑하고, 처녀자리와 잘 어울리는 양자리 상승궁 황소였다. 미래의 직업까지 보장된 매력적이며 매우 안정적인 보기 드문 아티스트였다. 그와 걷잡을 수 없이 사랑에 빠지면서도 헷갈렸다. 만난 지 두 번이 채 안 된 그 남자는 머지않아 올 내년에 애를 낳고 함께 자신이 교수를 하게 될 시골의 먼 도시로 떠나자고 했고, 난 그 제안에 설레다가도 망설이며, 또 당장 같은 집에 사는 꿈을 꾸기도 했다. 욕망의 거울.〉
⁴ 〈그들은 진짜 맛있는 희망을 처먹고 있다. 얼마 남지도 않았다는걸 모르는 건지, 못 본 척 하는 건지, 눈물을 먹이로 주며 호시탐탐 희망을 차지할 기회를 사방에서 노리고 있다. 우리는 정작 무슨일이 벌어지는지 알지도 못한 채 시들어 간다.〉

박론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낡은 캐비넷 속 잔뜩 몸을 부풀린 나바호 악세사리들 틈에 손을 꼭 맞잡고 있는 아이들을 데려오기 위해 카드를 긁었다. 잔고 부족, 2021. 사틴, 재봉마감, 손자수, 105 × 104 cm

박론디, 6년을 사귀고 헤어진 애인을 잊기 위해 앱에서 만난 사람과 소통하고 있었다. 그는 똑똑하고, 처녀자리와 잘 어울리는 양자리 상승궁 황소였다. 미래의 직업까지 보장된 매력적이며 매우 안정적인 보기 드문 아티스트였다. 그와 걷잡을 수 없이 사랑에 빠지면서도 헷갈렸다. 만난 지 두 번이 채 안 된 그 남자는 머지않아 올 내년에 애를 낳고 함께 자신이 교수를 하게 될 시골의 먼 도시로 떠나자고 했고, 난 그 제안에 설레다가도 망설이며, 또 당장 같은 집에 사는 꿈을 꾸기도 했다. 욕망의 거울., 2021, 캔버스에 과슈, 아크릴, 색연필, 160 × 390 cm

박론디, 불안이 시작되면 우리는 주어진 사과를 따먹는 것보다 매니악처럼 뛰어다니는것에 집중한다., 2023, 캔버스에 과슈, 230 x 160 cm

박론디, 그들은 진짜 맛있는 희망을 처먹고 있다. 얼마 남지도 않았다는걸 모르는 건지, 못 본 척 하는 건지, 눈물을 먹이로 주며 호시탐탐 희망을 차지할 기회를 사방에서 노리고 있다. 우리는 정작 무슨일이 벌어지는지 알지도 못한 채 시들어 간다., 2024, 캔버스에 과슈, 155 x 110 cm

박론디, Desperation=motivation, 2024, 도자에 유약, 23 x 22 x 5 cm

박론디, When Did TIME Become MONEY?, 2024, 도자에 유약, 23 x 22 x 5 cm
유근택(b. 1965)은 지난 30년간 한국 동양화의 전통과 현대성을 한 화면에 담아내는 실험적인 시도를 계속해 왔다. 한지와 먹, 호분 등의 전통 재료에 표면을 몇천 번이고 문지르고 채색하는 반복적인 행위로서 그의 독창성을 더한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자신의 ‘일상’에서 만난 ‘낯설음’에 상상력을 더한 새로운 세계를 화지에 담았다. 이로써 그는 작은 일상, 삶의 모습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 사회의 여러 장면을 내어놓는다.
작가는 2003년부터 현재까지 성신여자대학교 동양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하종현 미술상(2009), 이인성 미술상(2021) 등을 수상하였다. 현재는 서울 성북구에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겹겹의 시간, 손으로 쌓은 세계
글 신서연
오늘날, ‘나를 기록함’은 저장이나 추억에 머물지 않는다. 디지털 환경 속에서 개인의 기록은 가속화되어 빠르게 공유되고, 그 목적은 ‘나를 보여주는 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렇게 무수히, 그리고 빠르게 쏟아지는 기록들 안에서, 진실된 ‘나’의 감각과 순간은 오히려 희미해지기도 한다. 가속된 기록의 흐름은 우리의 삶을 단절하고 조각난 이미지와 이야기로 채운다.그런 흐름 속에서 유근택은 느리고 깊은 기록을 선택한다. 그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낯설고 기묘한 순간을 붙잡아, 상상의 층위를 더한 채 한지 위에 겹겹이 쌓아 올린다. 물에 불려 배접한 한지 위에 드로잉하고, 철솔로 수천 번 문질러 흔적을 남기고, 다시 색을 올린다. 그의 회화는 시간의 물성과 감각의 퇴적이다.유근택이 그려내는 일상은 작가의 삶이 반영된 일상이다. 그 순간의 작가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그와 세계가 만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분수>(2023)는 일상에서 마주한 대상에서 더 깊은 삶의 존재론적 사유를 끌어낸다. 작가는 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며, 이전 조형적 요소로 여겼던 분수의 모티브를 새롭게 바라봤다. 처연하게만 느껴졌던, 언젠가 부서지는 덧없는 존재인 분수는 부서진 그 물방울로 다시금 치솟아 올라온다. 그 아름다운 모습은 탄생과 소멸, 또한 삶을 살아가며 쓰러져도, 다시 박차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인간의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사실, 늘상 마주하는 거울 속 모습은 변함없지만 찰나의 내면과 개인의 서사를 통해, 작가는 매번의 순간마다 다른 모습을 본다. <거울>(2021, 2022)은 작가가 세계를 마주한 ‘나’를 새롭게 각인시키고, 잊혀진 감각을 여는 또 다른 세계의 모습이지 않을까.유근택의 작업실 벽은 드로잉으로 빼곡히 차 있다. 이는 단순히 작업을 위한 밑그림이 아니라, 순간과 감정의 축적이며 작가가 살아온 시간의 시각적 아카이브이자 기록된 시간의 지도가 된다. 이 지도는 새로운 드로잉이나 작업으로 재해석되는 창작의 순환을 겪는다.
<반영>(2023)은 산책하며 보았던 상암 월드컵공원의 물가와 그에 반사된 풍경을 사계절의 시간으로 담아냈다. 못에 반영된 상은 실제 눈앞에 보이는 존재이기도, 완전히 새로운 세계이기도 하다. 이 두 세계가 모호한 경계로, 흔들리며 공존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과 시각을 투영하게 한다.
<말하는 정원>(2018, 2019)으로 아버지가 누워있던 병원 옥상의 작은 꽃밭을 드로잉하여 회화로 담아냈다. 병든, 연로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빌딩에서 생명력을 내뿜는 꽃들을 마주한 순간, 작가는 대지를 뚫고 나온 생명의 경이로움과 기이한 힘을 느꼈다. 생명력으로 뻗어가는 식물들과 인간은 화지 안에서 하나가 된다.유근택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 그 순간을 천천히 감각하고, 반복하며, 되새긴다. 그렇게 오랜 시간 축적된 일상의 순간과 감각, 시간이 응축된 그의 기록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관객에게 낯설지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자신만의 시간을 투영하고, 잊고 있었던 감각을 다시 떠올린다.
결국 유근택의 회화는 오늘날 ‘무엇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시각적 응답이다. 그것은 순간의 삶의 조각을 붙잡는 일이자, 여전히 살아 있는 감각을 통해 세계와 관계 맺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전희수(b. 1986)는 일상에서의 사소하지만 특별한 순간들을 어린 시절 즐겨보던 만화처럼 표현한다. 작품에 담긴 것은 작가의 가장 사적인 이야기이지만, 픽셀화된 시각 언어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관람자에게 만화와 게임을 즐겼던 어린 시절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픽셀로 엮어낸 일상과 기억
글 이린
텍스트 없이도 이미지 자체만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만화의 문법은 전희수 작가가 가장 담고 싶은 순간을 기억하는 방법이 된다. 작가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일상을 자주 작품에 등장시키며, 아들의 모습을 만화 캐릭터처럼 표현하거나, 집안의 물건을 게임 속 아이템처럼 표현한다. 이는 관람자에게 어린 시절의 이유 모를 그리운 감각과 함께 일상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하면서, 개인의 삶과 시대의 감정이 교차하는 지점을 형성한다.<Summer Tree>는 나무 형태로 된 캔버스 위에 작가가 보냈던 여름의 기억을 담은 작품이다. 가족들과 함께 간 일본 여행에서 보냈던 시간들은 캔버스라는 나무 위에 마치 열매처럼 소중한 결실을 낳는다. 가족 여행에 동반한 울트라맨의 피규어 장난감, 호텔 방 앞에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귀여운 포즈를 하고 있는 딸의 모습, 길을 걷던 아들의 시선을 붙잡은 체리 파르페 모형의 이미지, 거울 앞에서 찍은 듯한 네 명의 가족 구성원의 모습까지. 이런 이미지들은 실제가 아닌, 현대인들이 어릴 적 읽었던 만화나 게임 속 픽셀 같은 이미지로 표현된다. 이와 같은 표현 방식으로 인해 작품은 동시대적 보편성을 갖게 되며, 관람자는 현실 세계에서 느끼는 일상적 즐거움뿐 아니라 게임 또는 만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겪었던 가상 세계의 즐거움도 동시에 즐기게 된다.<After Dinner>의 파편화된 이미지들은 일반적인 가정 내 식사 공간과 거실, 그리고 집 바깥마당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정신없이 어질러진 집은, 분리된 화면 구성으로 인해 제대로 공간을 파악할 수 없는 채 혼란스러운 상태로 관람자의 눈에 들어온다. 바닥에 떨어진 배추김치 한 포기와 고봉밥, 그리고 이러한 집밥과는 대비되는 피자의 습격. 그 외에도 작품 하단의 지하철은 집에서 저녁 먹을 생각을 하며 퇴근하는 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고, 바닥에 흩어져 있는 일상용품들은 친숙한 우리네들의 집을 보는 것 같다. 작가는 만화 ‘짱구는 못 말려’ 속 짱구네 집의 모습을 포스트 프로덕션의 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늘 행복해 보이는 이상적인 가정에도 분명 존재할 마구 어질러진 현실적인 거실의 모습을 표현했다. 특별한 설명이나 맥락 없이도 작품은 관람자로 하여금 각자가 경험한 다양한 상황을 떠올리게 하며, 사건 사고들이 항상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겹쳐 본다.<The Flatland>는 가로로 긴 캔버스 천 위에 다양한 상황을 정해진 순서 없이 제시하며 관람자가 장면들을 하나하나 읽어 나가도록 만든다. 작품 좌측에 놓인 물 아래로 가라앉는 돈 바구니의 이미지나, 집 창문에서 연기가 나고 있는 듯한 이미지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익숙한 몇몇 미니 게임들을 연상하게 한다. 작가는 어린 시절 가장 처음으로 경험했던 가상 현실인 게임들 속 여러 시공간을 꿰매, 회화 작품이라는 또 하나의 새로운 가상 공간을 완성했다. 작품 중앙에 반복되는 인물들은 이목구비가 없이 놓여 있어, 게임 속 캐릭터보다도 각각의 세계관 속 시공간에 집중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를 느낄 수 있다. 어릴 때 빠져들었던 만화와 게임 속 세상에 대한 기억은, 오늘날 현실보다 더욱 중요해진 가상 현실을 인식하는 감각의 시초가 된다. 작가는 유년기의 경험을 표현 방식으로 치환하여 회화 작품 위에 현실을 재구성하는 작품 세계를 탐색한다.픽셀 이미지, 게임 캐릭터의 형태, 비현실적인 공간 구조는 관람자에게 익숙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가상 현실 속 삶 이전, 어린 시절 경험했던 최초의 가상 세계인 만화와 게임은 우리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이입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초현실적인 화면 구성에도 불구하고, 이를 구성하고 있는 친근한 이미지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공유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행복했던, 그래서 그리운 이유 모를 감정은 결국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사이기도 할 것이다.

전희수, Summer Tree, 2024, 캔버스에 아크릴, 416.5 x 159 cm

전희수, After Dinner, 2022, 캔버스 배너에 아크릴, 214 x 350 cm

전희수, The flatland, 2022, 캔버스 배너에 아크릴, 214 x 540 cm
정찬민(b. 1991)은 디지털 기술과 자본주의 시스템이 신체와 감각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하며, 이를 영상과 설치, 데이터 기반 조형물로 시각화한다. ⟪행동부피⟫(2023, 대안공간루프), ⟪섬 프로젝트⟫(2025,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논알고리즘 챌린지⟫(2024, 세화미술관)에서 설치 및 미디어 작품으로 기술-신체-사회의 교차점을 가시화하였다. 거대 질서 속 무력감과 불안정이라는 세대적 풍경을 바탕으로, 기계적으로 구조화된 삶의 리듬 속에서 발생하는 신체의 반응과 감각의 파편을 ‘기록’으로 치환한다.
멀미로운 동승: 나의 몸 되찾기
글 이시원
“내가 신체를 가지지 않는다면 나에게 있어 공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메를로 퐁티, <지각의 현상학> 중
우리는 매일 어딘가를 향해 이동한다. 지도 앱을 켜고 가장 빠른 경로를 검색하며 도착 시간을 가늠한다. 바쁜 현대사회에서 이동 거리는 시간과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고, 이동은 목적지향적 행동이 되어간다. 하지만 이동 과정 속에서 우리의 몸은 어떤 경험을 하고 있는가?우리는 몸을 통해 세계를 감각한다. 메를로 퐁티의 신체 현상학에 따르면 우리 삶의 실질적인 원천은 몸을 통한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지각이며, 인간은 언제나 온몸으로 세계를 감각하고 세계와 뒤섞이면서 살아간다. 따라서 우리 몸이 느끼는 감각은 존재의 징표이자 삶 그 자체이다. 그러나 효율적 이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계적 진동으로 인해 우리의 몸은 쉽게 피로해지고, 감각의 뒤틀림을 경험하게 된다.정찬민은 <멀미로운 생활>과 <현상된 움직임>을 통해 일상의 이동 속에서 감각되는 신체의 피로와 혼란을 추적하며, 현대 기술이 추구하는 효율성의 기만적 측면을 드러낸다. <멀미로운 생활>의 내러티브는 광역버스를 탄 한 개인의 시점에서 진행되며, 로켓 발사와 관련된 영상과 내레이션이 중첩된다. 관람자는 1인칭 시점에서 멀미를 경험하게 된다. 멀미는 눈과 귀와 발 등에서 들어오는 정보들이 일치되지 않을 때, 지각의 혼란에서 비롯된 증상이다. 작가는 이를 효율적 이동의 반대급부로 우리가 얻게 되는 일종의 신체 소외 현상이라고 말한다. <현상된 움직임>은 작가가 광역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흔들린 작가의 정수리 기울기를 측정하고, 이 데이터를 3차원 형상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보이지 않던 신체의 진동은 질량과 부피를 획득하게 되며, 이를 통해 작가는 이동의 과정에서 우리 몸이 감수하게 되는 기회요인을 가시화한다. 버스의 진동과 흔들림은 단지 교통수단의 부작용이 아니라, 기술 중심의 사회가 개인의 몸에 부과하는 침묵의 흔적이다.정찬민의 작업은 관람자에게 동승의 경험을 제공한다. 관람자는 작가를 따라 덜컹이는 버스에 몸을 싣고, 멀미의 감각을 입체적인 형상으로서 맞닥뜨린다. 작가는 멀미로운 나날들 속 간과된 몸의 감각을 상기시키고 기술과 기계의 기만적 행위들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감각하는 주체로서의 신체를 되찾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작가의 반격은 섬세하고 부드러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가장 일상적 순간에의 동승을 통해, 흰 구름처럼 현상된 이동의 흔적을 통해 거대 질서 속 개인의 몸들이 감각하는 미시적이며 고유한 세계를 인정하고, 그 수만큼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발현될 미래를 꿈꾼다.

정찬민, 멀미로운 생활, 2024, 단채널, 사운드, 칼라, 1920 x 1080, H.264, 11분 43초
김현석 작가(b. 1988)는 인간과 기술 관계가 시간 속에 변화해온 양상을 추적해왔다. 그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기술이 인간의 시간 감각과 사고방식에 개입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특히 이미지가 풍화되는 ‘열화’와 이미지를 복원하는 ‘보간’에 주목하며, 기술이 만들어내는 ‘완벽함’에 의문을 제기한다. 나아가 테크놀로지 발전에 따라 변화해온 인류의 계보를 새롭게 써 내려가며, 기술을 인간 존재의 일부로 통합해 해석한다. 최근까지 김현석 작가는 개인전 《무한원점》(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 2022)과 단체전 《합성열병》(코리아나미술관, 서울, 2025), 《2084: 스페이스 오디세이(Unfold X)》(문화역서울284, 서울, 2024)에 참여하며, 동시대 예술 속 기술 서사의 가능성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기술적 존재의 계보: 우리는 기술로 태어난다
글 김효진
약 330만 년 전, 뗀석기는 눈앞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생존 도구이기도 했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황, 곧 닥쳐올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한 도구였다. 인간은 도구를 통해 미래를 상상하고, 시간의 흐름을 감각하는 존재가 되었다. 기술이 인간 존재 자체를 형성하는 오늘날, 우리는 기술 속에서 인간다움을 되묻고 재구성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다.김현석 작가는 〈완벽함에 대한 무의미적 행위〉(2015)에서 NASA의 초고화질 달 사진을 1픽셀 단위로 확대-축소하는 행위를 수백 번 반복한다. 반복적인 행위는 알고리즘에 미세한 오차를 축적시키고, 이미지 표면에 균열을 일으킨다. 영원히 보존될 것 같았던 디지털 이미지는 세월이 깃든 오래된 물건처럼 변한다. 디지털 이미지의 조작과 오류는 ‘보존되지 않은 시간’의 감각, 즉 열화라는 역설적 속성을 드러내며, 이상화된 영속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어지는 〈완벽의 기원〉(2023)은 앞선 작품의 열화된 디지털 이미지를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보간하려는 시도다. 인공지능 모델은 알고리즘 오류로 사라진 픽셀을 주변 정보의 평균값으로 채우고, 손상된 표면을 매끄럽게 복원한다. 중요한 것은 이 결과물이 과거의 원형이 아닌 존재한 적 없는 ‘그럴듯한 과거’라는 점이다. 이제 인공지능은 인간의 기억을 보존하는 것을 넘어,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기술은 인간의 시간 리듬을 흉내 내거나, 능가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시간성을 구축한다.이제 작가는 기술 발전의 속도가 인류의 진화 속도와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데이지-체인-아고라〉(2023)에선 기원전 260만 년 전의 올도완 석기부터 현대인의 도구 스마트폰까지, 기술 도구의 계보를 상상적으로 구성한다. 인공지능으로 생성된 복수의 인물들은 직렬로 연결된 데이지 체인(daisy chain)처럼 둥글게 둘러앉아, 계보에 대한 토론을 벌인다.
인공지능은 각각 고고학, 디자인, 환경 과학 등 인류 지성의 다양한 분야를 대표하는 석학으로서 인간을 대신해 지적 토론을 수행해낸다. 인간이 부여한 지식과 관점은 인공지능의 알고리즘 안에서 자동화된 방식으로 재조합되고, 새로운 담론처럼 다시 등장한다. 그렇게 표상은 실재를 덮어버리고, 도구의 진화는 선형이 아닌 가속의 곡선을 그린다. 이 무한한 리믹스의 회로 속에서, 인류의 진화는 예측 불가능한 서사를 따라 흘러간다.〈루시 1.0〉(2024)에 이르러선, 인류의 진화와 기술 진화는 하나의 축 위에 만나게 된다. 최초의 인류라고 불리는 루시의 해골에 스마트폰이 가로질러 꽂혀 있고, 스마트폰 내부에서는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인류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되짚는 루시의 읊조림이 들려온다.
루시는 언어가 문화권마다 분화되기 이전의 원초적 발화로 거슬러 올라가듯, 특정 성별이나 인종에 귀속되지 않는 목소리로 한국어, 영어, 일본어, 스페인어, 중국어를 복합적으로 뒤섞어 이야기한다. 루시의 웅얼거림은 점차 동사·명사·형용사 순으로 구조를 갖추는데, 이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나멘시스에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까지 인류의 궤적을 압축적으로 재현해내고 있다. 인류와 기술의 계보를 상기시키는 루시의 모습은 근미래에 등장할 포스트 휴먼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결국 인간의 손끝에서 시작된 기술로 인간은 다시 쓰이며 기술의 계보 속에서 태동한다.

김현석, 완벽함에 대한 무의미적 행위, 2015, 디지털 프린트, 152 x 152 cm
ⓒ CYJ ART STUDIO

김현석, 완벽의 기원, 2023, 디지털 프린트, 152 x 152 cm
ⓒ CYJ ART STUDIO

김현석, 데이지-체인-아고라, 2023, 혼합매체 (아이폰 스틸스탠드, 그립헤드, 그립암 클램프, PC, 케이블), 5채널 영상 설치, 컬러, 사운드, 27분(반복), 가변 크기
ⓒ 언리얼스튜디오

김현석, 루시 1.0, 2024, 혼합매체 (3D 프린트 위 채색, 스마트폰, 스테인리스 스틸 거치대), 단채널 영상 설치, 컬러, 사운드, 7분 (반복), 15.7 x 16.6 x 77 cm
ⓒ 2024 Chulhoon Jung and Permanent External Records, Seoul
노상호(b. 1986)는 디지털 네트워크 안에서 수집한 이미지를 재구성하여 회화와 영상, 그래픽 노블 등의 여러 형태로 다시 내보낸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양자에 관심을 둔 작가는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중간자로서의 감각으로 직접 그 사이의 모호한 선을 밝혀낸다. ‘어디선가 본 것’이거나 ‘처음 본 것’으로 출처를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호출하는 정서의 파편은, 어떤 기억처럼 보이지만 실은 기억조차 아닌 것들이다. 작가가 구축하는 이 비실재적 회상은 우리가 매일 스크롤하고 있는 디지털 이미지 환경의 속성과 다름없다.
디지털과 디짓 사이
글 강혜인
디지털Digital은 종종 비물질적인 가상의 세계로 여겨진다. 클릭과 전송으로 던져지고 스크롤로 발견되는 이미지들은 손이 닿지 않는 무형의 감각으로 오해된다. 그러나 그 세계의 기원이 손가락Digit에 있음을 떠올린다면, 이 감각적 비약은 다시금 조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새로운 손가락이 있다. 시각의 스펙터클에서 구원해 줄 촉각이 있다고 할 때, 디지털 매체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는 단지 화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보다도 가까이서 만지듯 감각되기를 요청하는 한 장의 얇은 그림이다. 그리고 그 이미지에는 분명히, 세계를 직접 분절하고 조직하려 화면을 더듬은 작가의 손가락적 행위가 남아 있다. 노상호의 회화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디지털 작업을 선행하고, 그것을 물리적 형태로 번역하려는 충동이다. 이로써 작가가 속한 디지털 네이티브와 아날로그 세대 그 중간 지점에서만 가질 수 있는 특정한 감각이 밝혀진다.<THE GREAT CHAPBOOK 3>(2023)의 화면에는 같은 하늘 아래 각자만의 맥락을 간직한 수많은 객체가 있지만, 기승전결이나 사건의 흐름을 따르는 이야기 구조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전체를 볼 필요도 없다. 그러나 여기엔 오직 작가가 천천히 복사한, 재구성된 이미지로 표상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의 모호한 ‘분위기’만이 잔존해 있다. 이 분위기는 이야기보다 먼저 우리에게 도착하는 것으로, 사건을 통해 시간을 밀고 가는 전통 서사와는 다른, 정지되었거나 질척이는 시간의 경험이다. 어디선가 본 것 같지만 알 수 없는 불편함과 그 끌림. 그렇게 그려지다 결국에는 화면 아래로 흘러 섞여 들어간 것들. 그런 것이 구성하는 얄팍한 화면이 있고, 우리는 그 팔랑임 속에 사는 탈 쓴 이들이나 녹지 않는 눈사람, 또는 번지지 않는 들불과 발사-정지 상태의 화살 같은 중간자적 모티브를 따라 두 개의 현실을 넘나들 수 있는 것이다.출몰된 사건을 비롯해 인터넷상에서 소위 ‘짤’로 불리는 이미지까지 포함하여 2014년부터 꾸준히 전개된 <THE GREAT CHAPBOOK> 드로잉 시리즈는 디지털 이미지의 파편적 성격을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 A4 용지 한 장에는 한 장면이 있다. 이 ‘장’들은 역시나 서사를 가진 척하지만, 익명의 순간이 붙여 본 조잡한 이야기가 될 바에는 하나의 컷으로 존재하기를 택한다. 이제는 밈이 된 뉴스의 한 컷부터 두 시간짜리 영화의 한 장면까지, 이들은 이미지에 따라 짧은 대사나 텍스트와의 병치를 통해 어딘가 우스꽝스럽고 어긋난 감정을 유발하며 특정 맥락 안에 회수되기를 거부한다. 빠르게 확산했다가 사라지고 다시 불현듯 나타나는 이 민담은, 과거와는 다른 속도로 각자의 생애를 지속하고 있다.이후 2022년부터 이어지고 있는 연작 <HOLY>에서는 에어브러시를 통해 새로운 질감을 도입한다. 이는 표면의 요철을 최소화하고, 매끈하고 균질한 디지털적 피부를 구현하는 데 적합한 도구이지만, 실은 고도로 아날로그적인 수행을 필요로 한다. 원하는 색감과 밀도를 얻기 위해서는 손의 각도, 압력, 몸의 위치 등을 섬세하게 조율해야 하며, 작가의 손가락은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긴장을 조정하는 촉각적 매개체가 된다. 그렇게 분사된 흐릿한 입자들은 디지털 이미지가 현실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생긴 감각의 잔향처럼 화면 위에 안착한다. 한편, 이 시리즈에서는 작가의 작업을 학습한 AI가 이미지 생성의 주체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조차도 작가의 축적된 경험과 반복된 손동작 위에 구축된 것으로, AI는 작가의 손가락이 남긴 리듬과 이미지 배열 방식을 학습해 그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감각적 대리자로 작동한다.결국 노상호의 회화는 우리에게 경계를 해체하자고 말하기보다는, 이 경계는 정말 투과적이며 둘 사이를 오가는 일은 즐겁다고 말한다. 그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손과 눈, 이미지와 감각 사이를 넘나들며 틈새에서 일어나는 모호함을 탐색한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긴장에 머무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매체 환경이 만들어낸 독특한 미학이자, 서사 없음의 서사가 만들어 낸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초상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전히 손끝으로 세계를 더듬고 있으며, 이 일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황현호 (b. 1981)는 홍익대학교 회화과 졸업 후, 회화를 기반으로 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라인프렌즈(Line friends)의 오리 캐릭터 ‘샐리 (Sally)’를 반복적으로 호출하며, 시선과 감정의 관계를 탐구한다. 작가에게 샐리는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평가와 기대를 담지 않은 순수한 응시의 주체이자, 무비판적 시선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감각의 통로다. 황현호는 샐리의 눈을 통해 세계를 다시 바라보고, 회화라는 수행의 장 안에서 상처 입은 자아를 복원해간다.
무(無)의 시선 속 무(虹)의 자화상
글 윤형민
시선(視線)은 단순한 바라봄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의 세계 안에서 내가 하나의 대상으로 객체화되는 순간이다. 그 짧은 순간, ‘나’는 타인의 기대와 해석의 틀 안에 갇히고, 하나의 이미지로 고정된다. ‘나’는 타인의 기대를 내면화하며 자아를 조형한다.오늘날, 이러한 시선은 디지털 환경 속에서 더욱 가시화된다. ‘보았다’는 행위는 기록으로 남고, ‘보여졌다’는 사실은 조회수로 치환된다. 타인의 시선은 이제 감각적 인상을 넘어서 수치화되고 축적되며, 끝없는 비교와 평가의 근거가 된다. ‘나’는 시선의 주체이자 대상이 되며,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눈을 의식하며 스스로를 재구성한다. 이 반복되는 조형의 과정으로 인해 ‘나’는 점차 마모된다. ‘나’는 끊임없이 타인을 보면서도, 끊임없이 타인에게 보여지는 존재로 살아간다.황현호는 이러한 시선의 피로 속에서 순수한 눈을 만났다. 평가도 기대도 담기지 않은 검은 눈. ‘라인프렌즈(Line friends)’ 오리 캐릭터 ‘샐리(Sally)’ 인형 앞에서 그는 ‘나’를 숨기지 않아도 되었다. 낯설 만큼 평온한 시선을 작가는 캔버스에 옮기기 시작했다.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샐리를 반복적으로 호출하는 행위는 단순한 재현를 넘어, 샐리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려는 수행적 실천이다.<Balanced>는 자아 회복의 가능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난다. 화면 중심에 자리한 샐리는 무지개빛 파장과 황금빛 별 사이를 부유한다. 샐리에게서 비롯된 무지개는 무비판적 시선 아래 비로소 가능해지는 자아의 다양성과 회복을 상징한다. 무지개는 상처 입은 감정의 편린들을 껴안고, 다양한 빛의 스펙트럼을 통해 ‘나’라는 존재를 다시 조립할 수 있게 한다. 밝게 빛나는 황금별들은 일시적인 보호막처럼 샐리의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 빛나는 별들은 외부의 시선을 무력화시켜 ‘나’의 감각만으로 내면을 복원할 수 있는 예외의 순간을 상징한다. 내면의 깊은 곳에서 발견 가능한 찰나의 회복 가능성. 작가는 샐리를 통해, ‘나’를 구성하고 타인을 감각할 수 있는 무의 시선을 재현한다.반면 <Holy Molly? Holy Sally!>는 내면의 회복 이후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약 90개의 원형 캔버스 위의 브랜드 로고와 문구는 일상의 이미지 소비가 야기하는 내면의 자극과 욕망의 생산을 시각화한 것이다. 감각을 마비시키는 작은 알약처럼, 형형색색의 다양한 화면에 우리는 현혹되고 압도된다. <Balanced>와 달리, 여기에서 샐리의 눈은 환하게 빛난다. 언뜻 보면 동시대 이미지들에 매료된 것처럼 읽힐 수 있지만, 이 빛은 외부의 자극에 쉽게 매혹되지 않는 내성을 가리킨다. 여기서도 빛나는 별은 쏟아지는 이미지들 속에서도 자기 감각을 지키려는 내면의 저항을 암시한다. <Holy Molly? Holy Sally!>는 자아의 회복을 바탕으로 이미지 과잉의 시대 속에서 어떻게 우리가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초상이다.타인의 시선에 의해 구성되고, 마모되어온 자아가, 어떠한 평가도 기대도 담지 않은 눈을 통해 스스로를 다시 바라볼 수 있을때, 비로소 ‘나’는 복원된다. 이 복원은 다시 타인을 감각할 수 있는 자리로 ‘나’를 이끈다. 샐리는 그런 응시의 전환점에 선 존재다. 샐리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다시금 세계 속의 ‘나’를 바라보는 행위, 그것은 곧, 시선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황현호는 이 조용한 전환의 순간에 우리에게 되묻는다.나는 지금, 누구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그리고 그 앞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황현호, Balanced, 2024, 캔버스에 아크릴 , 150 x 150 cm

황현호, Holy Molly? Holy Sally!, 2024, 캔버스에 아크릴, 가변설치
엘리너(Elinor O’Donovan, b. 1995)는 아일랜드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로, 개인적 기억과 언어, 대중문화를 매개로 사라지는 것들의 흔적을 탐구한다. 영상과 설치를 중심으로 이미지, 소리, 문자 등이 감각과 기억을 구성하는 방식을 서사적으로 풀어내며, 일상의 조각들 사이에서 문화적 파편과 감정의 여운을 포착한다. 고대 유산과 인터넷 밈, 그림책의 단어조차 동등하게 병치되며, 보이지 않지만 감각되는 유산을 조형화한다.
What Disappears, What Remains
글 Sarah Bakker
기억은 반드시 서사가 되지 않아도 된다. 엘리너는 유년기, 고대 유산, 언어의 기원과 시각적 감각 사이를 유영하며, 잊힌 형체들과 소리들의 여운을 따라간다. ‘바르바파파(Barbapapa)’는 그 출발점이다. 솜사탕을 뜻하는 프랑스어 barbe à papa에서 비롯된 이 핑크빛 존재는 시각적으로는 말랑하고 둥근 이미지를 남기며, 청각적으로는 그 이름이 전하는 곡선의 소리로 기억된다. 우리가 그를 기억한다면, 그것은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름이 가진 ‘bouba’ 같은 소리와 질감 때문일지도 모른다.작가는 회상한다. 책의 내용은 희미해졌지만, 속눈썹이었는지 눈썹이었는지 모를 그 흐릿한 인상은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석판에 새겨진 문자들이 해독되지 않더라도 낯설지 않은 것처럼. 알파벳 B와 P의 곡선은 기억 속에서 부드럽게 맴돌며, 형태와 소리가 하나가 된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언어와 무관하게 사람들 대부분이 ‘bouba’는 둥글고 ‘kiki’는 뾰족하다고 느낀다는 ‘bouba-kiki effect’를 떠올리게 한다. Barbapapa라는 이름은, 그가 어떤 모습일지를 소리로 말해준다.<Requiem for Barbapapa>는 기억과 감각이 교차하는 지점을 배회한다. 엘리너는 뉴욕의 박물관 진열장부터 오래된 유적, 사라진 프레스코화, 디지털 밈과 아동문화까지 다양한 시대와 매체를 가로지르며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지는가’를 질문한다. 역사는 돌에 새겨지지만, 기억은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다. 조각상은 남고, 그림은 벗겨지고, 책은 바래지만, 하나의 음절은 오랫동안 공명할 수 있다. Barbapapa는 그런 존재다.사라지되, 사라지지 않는 것.작가는 바르바파파를 복원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흐릿한 형체와 일그러진 윤곽, 떠도는 잔상을 따라간다. 이는 조용하고 은밀한 의식처럼, 흩어진 조각들을 위한 레퀴엠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다. 형태 없이 남은 문화의 잔재에 대한 치밀하고 지속적인 애도다. 언젠가 종이는 모두 사라지고, 이름조차 희미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부드러운 소리와 둥근 감각은 누군가의 마음속 어딘가를 계속 떠다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유산일 것이다.




Elinor O’Donovan, Requiem for Barbapapa, 2025, 4K 컬러 영상, 사운드, 06분 55초
엘리사 로뮐러(b. 2000)는 슈투트가르트 국립 조형예술대학 순수미술 학사 졸업 후, 슈투트가르트에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엘리사는 일종의 실험적 배열로 자신의 작업을 전개한다. 작가는 다양한 재료의 물질적 특성에 의도적으로 개입하고, 그 과정에서 여러 시간의 다양한 양상을 포착하고 연결한다. 이러한 예술적 실천은 변형의 과정을 동반하며, 전통적인 재료의 생산 및 사용 방식에 개입하고, 덧없거나 쉽게 인식되지 않는 조건들을 드러낸다. 작가는 단순한 재료의 실험에 그치지 않고, 개인적이고 시적인 방식으로 익숙한 인식의 틀을 전복시키며,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인식해온 익숙한 현실과는 다른 예술적 현실을 창조하며, 이 속에서 관람객은 자신의 위치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일상 속 흔적의 미학
: 무의식적 조형 행위의 디지털 시각화
글 김나현
일상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사물과 마주하고, 그것들과 접촉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러한 물리적 접촉이 어떤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이 다시 우리의 감각과 기억에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깊이 인식하는 경우는 드물다. 엘리사의 작업은 이러한 무의식적이고 일시적인 흔적들을 예술의 언어로 시각화함으로써,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감각의 층위를 드러낸다.그러한 작가적 시도가 잘 드러나는 작업은 <Polster>(2022)사진 연작 시리즈이다. 이 시리즈는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르 코르뷔지에가 디자인한 안락의자 10개를 위에서 내려다 본 시점으로 촬영한 것이다. 이 의자들은 슈투트가르트 시립미술관의 관객들의 편안한 작품 감상을 위해 작품 앞에 설치되었으며, 각 사진의 제목은 특정 작품 앞에 놓인 의자의 위치를 나타낸다. 미술관을 방문한 관객들이 의자에 앉아 작품을 감상하며 남긴 엉덩이 자국은 일종의 무의식적이고도 집단적인 조형행위가 된다. 조명의 빛과 주름의 모양들이 만들어내는 조각적 흔적은 일상적인 동시에 고유하며, 각기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다. 작가는 사진을 통해 기록함으로써, 관객의 무의식적 행위를 물질적으로 시각화하고 있다.<HVZ>(2022)는 작가가 취리히에서 작업을 하던 시기, 집과 작업실을 주로 기차로 오가며 사람들이 기차에 남기는 흔적들을 수집한 작업이다. 기차의 등받이에 남은 흔적들을 흑백으로 대비시켜 지문 크기로 출력함으로써, 각각의 정체성이 더욱 도드라진다.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만의 각기 다른 흔적을 남기고 있다.작가의 작업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세계와 맺는 물리적 접촉을 시각화한다. 이는 메를로퐁티가 말한 ‘몸을 통한 지각’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지각을 해석 이전의 가장 근본적인 세계 경험으로 보았으며, 작가의 사진은 이러한 무의식적 감각의 흔적을 포착해 예술로 전환한다. 엉덩이 자국이나 등받이의 주름처럼 사소한 흔적은, 결국 신체가 세계에 남긴 조용한 목소리이자, 감각이 기록된 물질의 표면이 된다.작가는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무의식적으로 남기는 흔적들도 예술이 될 수 있을까? 그 흔적은 어떻게 의미를 갖게 되는가?’ 작가는 특히 공공적 환경에서 발생하는 흔적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공간에서 발생하는 자취는 자연스레 여러 사람의 흔적을 거치며, 각자의 태도를 드러낸다. <Polster>에서의 엉덩이 자국들은 관객이 그림 앞에서 보낸 시간을 보여준다. 이 흔적은 미술에 익숙한 사람이든 문외한이든, 누구든 작품 앞에서 정직하게 머문 시간을 고요히 기록한 것이다. <HVZ>에 기록된 기차를 이용한 승객들의 등받이 자국은 통로와 창가쪽으로 몸이 쏠려 있는, 서로에게 부딪히지 않으려 반대쪽으로 몸을 기대는 사람들의 태도가 드러난다. 이렇듯 두 작업에서 물질적으로 시각화된 무의식적 행위들은 타인과 우리를 이해하는데 하나의 단서가 되어주기도 한다.하지만 이 흔적들은 대개 매우 일시적이고, 쉽게 사라지거나 변형된다. 이는 오늘날 정보가 초 단위로 생성되고 실시간으로 확산되었다가 곧 다른 정보에 밀려나는 디지털 환경과도 맞닿아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사람들은 과거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사유하고 소비하며, 기억보다는 순간에 반응하는 존재로 변모해 왔다. 의자에 남은 엉덩이 자국과 등받이에 남은 압력의 흔적은 비록 찰나에 그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선명하게 감각의 방향 상실, 기억의 부재, 즉 시간성의 특질을 드러낸다. 작가는 이 일시적 흔적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남기고 잊어버리는 것들에 대해 질문하며, 사라짐의 미학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포착하고자 한다.
‘교각들’은 미디어 아티스트 상희(b. 1995)와 내러티브 디자이너 성훈(b. 1997)이 2023년에 결성한 아티스트 콜렉티브이다. 둘은 관객이 참여함으로써 완성되는 인터렉티브한 매체의 작업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합을 맞춰 왔으며 인터렉티브 장르를 경험하는 관객이 마주하게 되는 가상 공간에서의 신체적 감각에 주목한다.
참을 수 없는 육신肉身의 가벼움
글 김서영
모든 물체의 단면을 상상해본다. 사과를 반으로 자르면 중간의 씨앗 부분을 둘러싼 연노란 색의 딱딱한 과육이 그 자태를 드러낼 것이고, 컴퓨터 내부에는 온갖 반도체 칩들이 가득할 것이다. 외부는 내부를 전제로 하고, 마찬가지로 내부는 외부를 전제로 하기에 응당 우리는 외부에 걸맞는 내부의 풍경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3D 모델링 캐릭터가 여러 사회적 도상의 통로로서 기능하고 친밀감을 매개하는 것은 캐릭터 내부에 육화肉化된 실체의 몸이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3D 모델링 캐릭터 내부는 완전히 텅 빈, 입력값이 존재하지 않는 객체이다. 캐릭터 내부에 실체의 몸이 있다는 상상의 여지를 남겨두어야 하기 때문에, 이 텅 빈 내부는 발설되어서는 안되는 영역이고 이것이 노출되는 것은 기술적 오류에 해당한다.<미소녀는 수육受肉하지 않는다>(2024-2025)는 미소녀 캐릭터 ‘TEE’의 신체 내부의 텅 빈 모습을 과감없이 드러낸다. 아니, 애초에 텅 비어 있으니 신체가 있다는 전제부터 옳지 못하다. 본 작품은 육신肉身의 논리가 더 이상 지배하지 않는 죽음 이후의 폐허의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TEE’는 한없이 가볍고 움직임은 부자연스러우며 이곳 가상의 폐허 속에는 모두 완벽하게 동일한 ‘TEE’ 캐릭터들 뿐이다. 여기엔 어떠한 생동감도 부재하며 캐릭터들간의 대화도 겉돌기만 할 뿐 제대로된 상호작용과 의미생성은 일어나지 않는다. 의미는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나와 너가 구분되지 않는 세계관 속 내가 너에게 거는 소통의 시도는 그저 거울에 반사되어 언제나 나에게로만 되돌아 올 뿐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TEE’의 생명력이 부재한 신체 기관들을 유비하는 인터페이스를 작동시키며 캐릭터와 긴밀하게 연결되지만 캐릭터에 완전히 합치되지는 못한다. 이처럼 ‘교각들’은 ‘TEE’의 정체성이 생겨나고 그 정체성에 우리를 투영시킬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교각들’은 섹슈얼리티, 젠더, 우정의 기능을 수행하는 미소녀의 도상을 차용하면서도 의도적으로 무력화한다. 이는 말하자면, 기의(Signified)와 기표(Signifier)사이에 존재하였던 견고하고 클리셰적인 봉합을 작가적 상상력을 통해 해체한 것이다. 기의와 그것의 의미를 담보해준다고 여겨지는 기표간의 관계는 임의적이고 인위적인 사회적 약속에 불과하며, 절대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예컨대, 미소녀의 신체는 온갖 사회적 기호(Sign)들의 집합체이고 그 기호들 너머에 자리잡은 허상을 때로는 직시할 필요가 있다. ‘교각들’은 미소녀 캐릭터 ‘TEE’의 신체를 탈착가능한 것으로 설정하여 신체를 반납한 미소녀들이 사회의 의미망 네트워크가 작동하지 않는 공간을 향유하도록 하였다. 미소녀들은 육신肉身으로 환생함을 의미하는 ‘수육受肉’은 할 수 없어도 어쩌면 이곳은 폐허의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유토피아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교각들, 미소녀는 수육受肉하지 않는다, 2024-2025, 인터랙티브 리얼타임 시뮬레이션, 싱글 플레이

교각들, 천사의 허물, 2024, 천에 텍스타일 프린팅, 철제 구조물, 가변크기
김웅현(b. 1984)은 디지털 환경에서 구성되는 이미지, 서사, 신체 등에 관심을 두고 영상, 설치, 퍼포먼스의 형식으로 가상의 서사를 구축한다. 사회적 이슈와 허구적 상상을 결합한 그의 작업은 동시대의 인간이 눈 앞에 부닥친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을 탐색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광주비엔날레 파빌리온 등에서 작품을 선보였으며, 플랫폼 ‘퍼폼(PERFORM)’을 기획·운영하며 동시대 예술의 확장된 실천을 이어가고 있다.
한데 구겨진 현실과 픽션
글 박민지
디지털 세계의 서사는 늘 실재를 참조하지만, 그 양상은 단선적이지 않고 다층적이다. SNS, 웹, 게임 등의 디지털 플랫폼에서 살아가는 오늘날의 개인은 일상의 사소한 사건조차 픽션처럼 소비하고, 반대로 가상을 실재처럼 수용한다. 김웅현은 이러한 유동적인 조건 속에서 허구와 현실, 게임과 뉴스, 기억과 망각의 경계를 교란하며 이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방식으로 작업을 이어왔다.〈리보솜〉(2021)은 기생식물 라플레시아의 독특한 생식 방식인 ‘수평적 유전자 이동’을 모티브로 삼는다. 이는 유전자가 직접 진화하지 않더라도 다른 식물의 유전 정보에 편승해 살아가는 생존 방식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다가왔을 때, 라플레시아는 연약한 인간에게마저 기생할 수 있을까? 영상 속 인간은 자신의 피부색을 잃고, 라플레시아를 위해 ‘완벽한 숙주를 위한 식생 도감’을 기록하는 존재가 된다. 이 장면은 결국 인간이 생태계에서 가장 취약한 개체로 전락하는 모습을 상징한다.이어 〈힌덴부르크 라운지〉(2022)는 1937년 독일의 비행선 힌덴부르크가 폭발한 사고에서 출발해,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붙들린 인간을 조명한다. 영상에는 마치 사람인 양 전화를 받고 카메라를 응시하며 이야기를 전하는 구겨진 종이가 등장한다. 우리는 종종 미래를 예측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지만, 사실 한 장의 종이가 그러하듯 우리의 삶 또한 쉽게 구겨지고 만다. 구겨진 종이는 미래를 손에 쥐려는 우리의 욕망을 닮았고, 그 주름진 표면에는 어떤 기술로도 가늠하기 어려운 미래가 고요히 내려앉아 있다.올해 제작된 신작 〈A side Skin〉(2025)과 〈B side Skin〉(2025)은 큐알코드 형태로 제작된 비닐 조형물이다. 각각의 큐알코드는 영상 작품 〈비닐,베기의알고리즘_A side〉(2020)와 〈비닐,베기의알고리즘_B side〉(2020)로 이어져, 관람자는 각자의 스마트폰으로 이를 직접 감상할 수 있다.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각종 SNS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세로 영상의 형식과 인터페이스를 차용한 두 영상은, 관람자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감상함으로써 더욱 ‘숏폼’에 가까운 방식으로 제시된다. 인간도 결국 곤죽처럼 렌더링되는 대상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작가의 상상은 3D 그래픽 툴의 렌더링 머신과 실제 동물의 살처분 과정이 공유하는 폭력성을 드러낸다. 두 과정은 모두 어떤 것을 기계적 통계와 매뉴얼로 환원하며, 그 고유성을 소거한다는 점에서 서로 닮아 있다.이렇듯 김웅현은 가상을 매개로 실재를 말하고, 실재를 빌어 가상을 재구성한다. 그 구획은 뚜렷하게 나뉘지 않고 도리어 의도적으로 모호해진다. 그렇게 구겨진 현실과 픽션은 서로의 경계를 지운 채 하나의 감각으로 우리 앞에 겹쳐진다. 그의 작품은 흐릿하게 교차한 사실과 상상의 접점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사회를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일 것인지 묻는다.

김웅현, 리보솜, 2021, 3D, 파운드푸티지, 단채널, 사운드, 컬러, 1920x1080 30p, H.264, 12분 57초

김웅현, 힌덴부르크 라운지, 2022, 3D, 파운드푸티지, 단채널, 사운드, 컬러, 1920x1080 30p, H.264, 12분 2초

김웅현, A side Skin, 2025, 검정비닐, 90 x 90 cm
김웅현, 비닐,베기의알고리즘_A side, 2020, 릴스, 아이폰 비디오, 파운드푸티지, 2채널, 사운드, 컬러, 1080x1920 30p, H.264, 13분 13초

김웅현, B side Skin, 2025, 검정비닐, 90 x 90 cm
김웅현, 비닐,베기의알고리즘_B side, 2020, 릴스, 아이폰 비디오, 파운드푸티지, 2채널, 사운드, 컬러, 1080x1920 30p, H.264, 7분 21초
류성실(b. 1993)은 ‘체리장’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해 1인 방송 형식의 영상 작업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자극적인 이미지와 현실을 풍자하는 서사를 통해, 동시대 한국 사회에 내재한 자본주의적 가치와 인간의 욕망을 시각적으로 드러냈다. 영상, 설치, 인터랙티브 미디어로 작업을 확장했으며, 이러한 작업으로 주목받아 역대 최연소로 제19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을 수상했다.
류성실의 작품은 허구적 캐릭터의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현실과 허구를 교차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등장인물들은 이상적인 이야기를 표방하지만, 점차 계산적이고 속물적인 언행으로 돈과 명예, 성공에 대한 노골적 욕망을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한국 사회 특유의 물질주의 구조와 그 이면의 부도덕성과 허위성을 적나라하게 나타낸다. 금전적 이익과 권력을 위해 사회적 책임과 검증 체계가 취약한 현실을 이용하고, 약자의 감정까지 착취하는 모습을 통해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비판적으로 비춘다. 이러한 장면들은 조악하고 과장된 시각적 연출로 현실의 부조리를 드러내면서도 화려하게 포장해 관객이 불편함과 묘한 끌림을 느끼게 한다.
허구의 실재, 진실의 허구
: 욕망과 결핍이 만드는 디지털 신뢰
글 최재희
오늘날 우리는 실재하지 않는 인물이 화면 속에서 목소리를 얻고, 진위를 가늠할 수 없는 정보를 퍼뜨리는 장면에 익숙하다. 가짜 뉴스, 할루시네이션¹ , 조작된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디지털 환경에서 진실은 더 이상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류성실의 ‘BJ 체리장’이라는 이 가상의 존재는 어떻게 믿음과 욕망을 매개하며, 실제의 조건을 교란하는지를 드러낸다. 하얗게 분칠한 얼굴, 음성 변조된 목소리, 시청자를 ‘오빠’라고 부르는 어투. 거기에 핵미사일 경보와 ‘일등 시민권’이라는 자극적 메시지를 시종일관 확신에 찬 어조로 반복하는 이 1인 방송은, 빠르게 온라인에 확산된다.댓글에서는 영상의 사실 여부를 토론하고, 어떤 이들은 장난인지 진심인지 그녀를 신봉하기까지 한다. 이윽고 체리장을 사칭하는 계정들이 등장 하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인물은 영향력을 획득한다. 체리장은 그 자체로 디지털 환경 속 ‘실재와 허구의 경계’가 얼마나 유동적인지를 드러내는 존재가 된다.〈BJ 체리장 2018.4〉(2018)는 "핵미사일 발사"라는 국가 재난 메시지로 시작하며, 풍수지리와 '에네르기파' 같은 비과학적이고 신빙성 없는 자료로 한국을 투하 지점으로 지목한다. 종말을 대비해 '하늘나라 시민'이 되라며 후원을 유도한다.〈BJ 체리장 2018.9〉(2018)에서는 이전에 핵미사일을 피해 해외로 간 체리장이 한국행 일등석 체험 영상을 통해 '일등 시민이 되는 법'을 설파한다. ‘항상 웃자’, ‘돕고 살자’, ‘EQ를 기르자’라는 세 가지 방법은 표면적으로는 이타적인 삶을 강조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금전적 후원을 유도하며, 특정 후원자를 ‘일등 시민권자’로 부각하는 허위적 구도를 구축한다.조악한 영상 편집과 과장된 연출 등은 명백히 '가짜'처럼 보이는 형식을 취한다. 그러나 능숙한 화법, 전문성 있어 보이는 자료들은 그럴듯한 설득력을 만들어낸다. 제시되는 문서들은 사실 무관한 자료를 모은 짜깁기에 불과하지만, '인쇄된 아날로그'라는 형식이 오히려 디지털 시대에 더 진짜처럼 받아들여진다. 허술함과 권위적 연출이 결합할 때, 믿음은 더 쉽게 작동한다.또한, 과장되고 자극적인 성공의 이미지와 조잡한 그래픽이 반복적으로 제시되며, 논리적 근거가 없는 메시지가 끊임없이 주입한다. 이러한 연출은 관객이 이를 신뢰할지 판단할 여유를 빼앗고, 의도적으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특히, '시간'은 허구적 세계에서 유일하게 객관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으로 작동한다. 영상 시작 전 초읽기, 머리에 장착된 초시계, 지속적인 비프음은 현실의 시간처럼 체감되어 관객을 긴장과 몰입으로 끌어들인다. 이러한 긴급성은 홈쇼핑의 타임세일이나 FOMO(Fear of Missing Out) 전략과 유사하게 작동해 시청자의 즉각적 반응을 유도하며, 관객의 판단과 심리적 거리를 마비시킨다. 작가는 정보의 과잉과 감각의 조작이 어떻게 꾸며낸 이야기를 진실로 전환하는지를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체리장의 정체나 주장에 대한 신뢰성은 중요하지 않게 되고, 오로지 성공과 부에 대한 욕망만이 관객에게 강하게 남는다.결국 작가는 ‘어떻게 허구가 진실처럼 작동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명백하게 조작된 이야기는 설득력 있는 이미지와 정보로 치장되어, 현실에서 충족되지 못한 관객의 결핍과 욕망을 자극한다. 디지털 매체 환경에서 우리는 진실의 실체보다도 욕망에 기반한 믿음과 몰입을 통해 이를 현실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체리장은 허구적 장치를 통해 현실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교란하면서, 우리가 신뢰하고 믿는 ‘진실’이 얼마나 쉽게 구성되고 변형될 수 있는지를 되묻는다.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낸 허구에 신뢰를 부여하며, 그것을 현실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¹ 할루시네이션은 환각, 환영을 뜻하는 영어단어로, 인공지능이 실제처럼 보이도록 언어를 생성하면서 사실과 다른 잘못된 정보를 만들어내는 현상을 뜻한다. (출처: Cambridge Dictionary, https://dictionary.cambridge.org/dictionary/english/hallucination, 접속일: 2025.6.29)

류성실, BJ 체리장 2018.4, 2018, 단채널 영상, 6분 12초

류성실, BJ 체리장 2018.9, 2018, 단채널 영상, 11분
머피염(b. 1994)은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활동하는 작가로, 조형예술을 기반으로 영상, 사진,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든다. 사회적 통념과 개인의 경험 사이의 아이러니를 깊이 있게 탐구하며, 일상의 익숙한 이미지들 속에서 이질적인 사물을 병치하는 독특한 방식을 통해 은은하게 스며든 감각적 불협화음을 음미하게 하며 익숙함의 경계를 조명한다.
Contemporary Fairy Tales
글 김영원
〈Aqua Pouch (Privas)〉(2025)는 프랑스의 아시안 식료품점 쇼윈도에서 마주친 두 음식의 기묘한 조합에서 출발한다. 푸른 형광등 아래 멀찍이 놓인 두리안과 미소된장 패키지는 그 자체로 조형적 낯섦을 자아내며, 우리가 고민 없이 소비해 온 것들에게 은밀히 내재된 서사적 생명력을 부여한다. 작가는 이 장면을 기민하게 포착하여 그날의 쇼윈도 속 풍경을 비스듬한 시선으로 제시하고, 바삐도 권태로운 일상 아래 멸종된 타자성의 감각을 극대화한다. 이때 우리는 나 자신이 두리안과 미소 둘 중에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저 우연히, 무해하게, 같은 공간에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된다.이러한 사물 간의 병치 감각은 유럽 민속 설화를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한 ‘데스크톱 다큐멘터리’ 형식의 〈Changelings〉(2021)을 통해 이어진다. 요정이 인간 아이를 낯선 존재로 바꿔치기한다는 오래된 이야기는 현대 사회의 불안정한 자아감이라는 시대상과 맞닿아 있다. 특히 바꿔치기의 모티프는 ‘리본돌(reborn doll)’이라는 실물 아기 인형과 연결되는데, 이 인형은 단순한 수집품에서부터 아이의 상실을 경험한 다양한 연령층의 여성들에게 애착과 치유의 대리 존재로 자리한다. 인간과 비인간, 실재와 허구가 뒤섞인 사이보그적 상상력은 아카이빙된 신비로운 이미지와 커뮤니티의 댓글이 혼합된 장면들을 통해 관습적인 돌봄의 의미를 확장한다. ‘존재하지 않지만 감각되는’ 마법적 존재의 가능성은 과연 우리를 어디로 안내할 수 있을까?〈Sweet Summer Nightmare〉(2025)은 동일한 개념 축 위에서 감정의 밀도를 높이며 관념의 전환을 시도한다. 일반적으로 남성형 괴물로 표상되는 늑대인간의 이미지를 각기 다른 2명의 ‘어머니’로 치환하면서 모성과 타자성이 중첩된 두 개의 서사를 교차시킨다. 같은 디렉션으로 다른 공간에서 펼쳐지는 두 이야기 속 인물들은 아이와 반려견을 훔치듯 조심스레 다가가지만, 장면은 돌봄의 제스처로 전환되며 긴장감이 해소된다. 정형화된 이미지의 전복 속에서 인간과 괴물, 가족과 타자, 보호와 침입의 경계는 흐릿해지고, 결국 돌봄 노동의 조건과 복잡성에 대해 되묻게 된다. 늑대인간이 아이를 돌보는 장면은 어딘가 이질적이지만, 동시에 여성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말이다. 여름밤, 달콤 쌉싸름한 맛의 페어리 테일은 우리가 의심할 필요조차 없었던 위계와 모성에 관한 관념을 환상적이고도 기이하게 그려낸다.세 작업은 관람자에게 일관된 질문을 던진다. 부조화한 사물, 유령적 이미지, 변신하는 신체를 통해 잔존하는 편견에 여백을 만들고, 타자의 감각이 머릿속으로 흘러들게 한다. 이처럼 저장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남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말로 남기지 못한 감정이거나, 형태를 잃은 채 떠도는 기억일지도 모른다. 머피염은 그런 존재들을 불러낸다. 이들은 모두 기록되지 않았지만 감각되어 버린 것으로서, 삭제된 적 없지만 저장된 줄도 몰랐던 장면들이다. 동시대의 페어리 테일은 그렇게 비밀스레 쓰이고 있다.

Murphy Yum, Aqua Pouch (privas), 2025, 종이에 디지털 프린트, 아티스트 프레임; 플렉시글라스, 60 × 50 × 12 cm

Stand Alone Complex (Murphy Yum, Berni*e Poikāne), Changelings, 2021, 단채널 비디오, 사운드, 컬러, 12분

Stand Alone Complex (Murphy Yum, Berni*e Poikāne), Sweet Summer Nightmare, 2025, 단채널 비디오, 사운드, 컬러, 9분 40초, 2채널 비디오 원본을 각색. 라 그레네트리 – 우이으 시립 아트센터 (프랑스) 공동제작
선점원은 패션디자인을 전공한 뒤, 봉제인형을 활용한 조형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AI로 생성한 이미지를 원단에 프린트하고, 이를 다시 봉제하여 현실로 구현하는 독특한 제작 방식을 선보인다. 선점원에게 봉제인형은 구체적인 이야기를 담기에 적합한 소재이자, 그의 직관적인 표현 방식을 그대로 투영하는 통로다. 그는 평소 디지털 환경 속에서 형성되는 인간 관계에 관심을 가져왔으며, 이번 전시에서는 그 관심을 바탕으로 새롭게 제작한 세 점의 신작을 선보인다.
Beyond the Glance
글 권소연
오늘날 우리의 일상은 끝없이 이어지는 스크롤 속에서 흘러간다. 쇼츠, 밈, 릴스처럼 쉴 새 없이 생성되고 소비되는 이미지들은 단 몇 초의 시선으로 판단된다. 우리는 아주 짧은 순간 안에 누군가를 평가하고, 재단하고, 단정 짓는다. 실제가 어떤지 확인할 새 없이 내려지는 이 판단은 때로는 날카롭고, 종종 폭력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그 판단의 순간에서 묘한 우월감이나 안도감을 느낀다. 그렇게 형성된 시선은 점점 익숙해지며, 타인을 판단하고 배제하는 방식은 어느새 일상의 태도로 굳어간다. 그리고 그 반복은, 하나의 문화처럼 공유되고 확산된다. 그렇게 우리는 실제를 마주할 기회 없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익숙해진 것은 ‘응시’가 아니라 ‘넘김’일지 모른다.〈핑크 박스〉(2025)는 SNS에 드러나는 비난과 단정의 문화를 입체화한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감정이 앞서는 반응, 군중의 공격성에 주목한 이 작업은, 온라인에선 익숙하지만 실물로는 낯선 장면을 형상화해 불편함을 불러낸다. 중심부의 핑크박스는 ‘콘텐츠가 처음 담고 있던 의미’를 상징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장된 얼굴들에 둘러싸이며 점차 가려지고 왜곡된다.〈KHIVI〉(2025)는 이미지와 실재, 정면과 측면의 간극을 조형적으로 드러낸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익숙하고 평범한 표정이지만, 관람자의 시선이 옆으로 이동하면서 드러나는 것은 왜곡되고 고통스러운 신체다. 그는 조각의 구조를 통해 하나의 시점에 모든 진실이 담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한다.〈비공식비〉(2025)는 이번 전시의 제목인 ‘우리 시대의 비공식적 역사’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신작으로, 디지털 시대의 기억 방식과 기록 구조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려는 조형적 실험이다.
‘비석‘은 공동체의 기억을 오래 붙잡아두기 위한 장치다. 사람들은 기억하길 바라는 이름과 사건을 시간에 지워지지 않는 돌 위에 새겨 남긴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새겨진 것은 이름이나 사건이 아니라, 수많은 QR 코드다. 관람자가 이를 스캔하면 각기 다른 소셜 미디어 페이지, 밈, 짧은 영상 등 동시대의 디지털 콘텐츠로 연결된다. 이러한 콘텐츠들은 집단적 기억보다는, 빠르게 소비되는 ‘순간’에 반응하는 오늘날의 감각을 보여준다. 한때 잊혔던 이미지는 QR코드를 통해 다시 떠오르고, 그 안에서 과거와 현재, 개인의 기억과 감정이 어우러진다. 이 과정에서 관람자는 자신도 짧은 순간들에 반응하고 흔적을 남기며 살아가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선점원은 이런 디지털 흔적들을 시간을 견디는 물리적 형상에 새긴다. 과거에는 위대한 이름과 사건만을 담았던 비석의 형식 위에, 지금은 스쳐가는 디지털 이미지와 사적인 코드들이 새겨진다.
이러한 시도는 기록의 위계에 균열을 내고, ‘무엇이 기억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비공식비〉는 이번 전시의 주제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어버리는가에 대한 질문이자, 공식적인 서사에 담기지 않았던 개인들의 시간과 감각을 불러내는 비공식적 기념비다.
이미지가 빠르게 소비되고, 관계마저 스쳐 지나가는 시대.
선점원은 익숙한 시선을 멈춰 세우려 한다.
그는 누군가의 얼굴 위를 무심히 넘기던 손끝을 붙잡아, 일상의 이미지를 살짝 비틀고 관람자의 감각을 흔든다.
그 순간, 관람자의 시선의 주도권 역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낯설어진 장면 앞에서, 작가는 묻는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끝내 보지 않은 채 지나쳐왔는가.

선점원, 핑크박스, 2025, 원단, 솜, 38 x 46 x 42 cm

선점원, KHIVI, 2025, 원단, 솜, 79 x 40 x 70 cm
추수는 홍익대학교에서 판화과와 예술학과를 복수 전공한 뒤,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 조형예술대학교에서 디플롬(학석사 통합과정)을 마치고 동대학에서 강의중이다. 추수는 전통 매체인 판화를 공부했으나 게임을 좋아하며 자연스레 디지털, 3D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인 작가는 현실 세계와 디지털 세계의 경계를 탐구하는 작업을 한다.
허물어지는 꿈
글 박한비
추수는 물리 세계가 디지털 세계의 우위에 있다고 상정하지 않으며, 우리 시대를 디지털 세계에 정신을 두고 물리 세계에 살아가는 '이행'의 시대라고 말한다. 디지털 속 가상은 물리 세계의 질서를 반영하며 동시에 그것에서 벗어나는 가능성을 꿈꾼다. 추수의 작업은 계속하여 이 두 세계의 경계를 허물어트리는 시도를 보여준다. <에이미의 멜랑콜리> 속 에이미(Aimy)는 본래 한 AI 음악 회사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버추얼 인플루언서로, 처음 제작을 요청받았을 때 작가는 제안을 거절했다. 음악 회사 측은 전형적인 여성 아이돌의 모습을 가진 캐릭터를 기대하였으나, 그는 게임을 좋아하면서도 늘 그 안의 캐릭터들이 가진 전형성에는 거부감을 느껴왔기에 현실 세계의 한계를 디지털로 되새김질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그녀에게 새로운 모습이 있다면? 나아가 ‘그녀’조차 벗어던질 수 있는 정체성이 된다면? 위와 같은 질문에서 탄생한 에이미(Aimy)는 낮에는 약 50곡의 저작권을 가진 가수 에이미 문으로 활동하지만, 밤에는 아직 쓰이지 않은 서사 속에서 부유한다.작가가 장어, 달팽이, 지렁이, 거머리, 플라나리아 등 자연 속 자웅동체 동물에서 영감을 받았듯, 인간의 믿음 중 젠더보다 더 강력한 허구가 있을까? <나의 아쿠아리움: 제0의 성>은 생물학적 몸을 가진 존재들이 이분법적 정체성을 거부하며 서울이라는 거대한 아쿠아리움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담았다. 그들의 곁은 자웅동체 생물들이 지키고 있다. 자웅동체의 에너지는 <아가몬> 페인팅 시리즈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성(sex)과 연관되는 형태로 진화하여 나타난다. 추수는 예술가가 되는 것만큼 누군가의 엄마가 되는 것을 오랫동안 바라왔지만, 두 가지를 함께 이루는 것은 쉽지 않았다. 예술가의 정체성을 위해 엄마가 되는 것은 미뤄질 수 밖에 없었으나, 예술가의 삶에 집중하는 것은 작업을 자식처럼 여기게 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추수의 바람은 디지털 세계¹를 거쳐 다시 현실 세계²로 돌아오는데, 그중 <아가몬> 페인팅 시리즈는 현실 세계에서 물질로서 모습을 갖추기 전 먼저 태어난 평면들이다. 추수는 ‘아가몬’을 오르가즘의 순간 탄생한 몬스터라고 부른다.추수의 작업에서 꾸준히 읽히는 것은 자유에 대한 열망이다. 매끈한 서사에서 탈출할 자유, 재생산에 참여할 자유, 퀴어성을 실천하기 위해 몸에서 벗어날 자유, 함께 침대에 갈 남자를 고를 자유³. 그에게 디지털은 자유를 실천할 창이며 동시에 그의 실제를 반영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¹ 슈뢰딩거의 베이비, 2019, 3채널 비디오, 설치, 4주 00:05:25, 8주 00:04:11, 16주 00:04:19
² 추수, 아가몬, 2023-5, 페인팅, 조각, 설치, 비디오
³ 추수, 슈투트가르트의 조신한 청년들, 2018, VR게임, 음악 Ivan Syrov
추수, 에이미의 멜랑콜리, 비디오 시리즈, 2021, 반복 재생

추수, 나의 아쿠아리움 : 제0의 성 #5, 2020, 피그먼트 프린트, 100 x 100 cm

추수, 나의 아쿠아리움 : 제0의 성 #6, 2020, 피그먼트 프린트, 100 x 100 cm